들어가며 — 잘못된 질문
"북한 주민은 왜 저항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30년째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30년째 잘못된 방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세뇌됐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이 답들은 모두 틀렸다.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저항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 "저항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리고
북한 정권은 그것을 어떻게 완벽하게 제거했는가."
저항에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했을 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어야 한다.
북한 체제는 이 4가지를 70년에 걸쳐 구조적으로,
잔인하게 전면 제거했다.
1. 저항의 탄생을 막는다 — 3층위 감시 시스템
모든 저항은 불만의 공유에서 시작된다. 북한은 이 공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층위는 인민반과 생활총화다. 북한 주민들은 직장에서는 당 조직, 학교에서는 소년단과 청년동맹을
통해 주 1회 생활총화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감시한
결과와 동료를 감시한 결과를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인민반이 이 역할을 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공개된 감시다. 그러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두 번째 층위가 진짜 공포다. 북한 국가보위성 정보원의 밀도는 주민 30명당 1명이다. 이들은 철저한 성분 검토와 시험을 거쳐 은밀히 선발된다. 정기적인 실적 할당제가 있어 누군가를 고발하지 않으면 정보원 자신이 위험해진다. 연 1~3회 밀봉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고 잔인한 수법이
있다. 보위부는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그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를 정보원으로 포섭해 붙인다. 당신이 가장 믿는 사람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대학가에는 정보원 밀도가 훨씬 높다. 젊은 지식층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서다.
2012년 12월,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의 지시를 보도했다.
"어디서나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장악하라."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북한은 민간 5개 계통(노동당·보위부·안전부·청년동맹·인민위원회)과 군 3개
계통(지휘체계·보위국·정치부)이 매일 말단에서 평양까지 보고하는 8중 중복 감시망을 가동하고 있다. 반체제 관련 사안은 말단에서 중앙으로 직접 보고가 가능하다. 말단
마을의 작은 움직임 하나가 단 몇 시간 만에 김정은의 집무실에 도달한다.
2. 저항의 성장을 막는다 — 연좌제와 변절
설령 불만을 공유했다 해도, 조직화 단계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1961년 5·16 당시 박정희 장군은
거사를 결행하며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박태준에게 자신의 가족을 부탁했다. 실패해도 자기 혼자 책임지면
된다는 계산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 수 있었다.
북한은 다르다. 저항하다 실패하면 본인만 죽는 것이 아니다. 부모, 형제, 자녀, 갓 태어난
손자까지 3대가 예외 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무리 분노가 끓어오르고 용기가 있어도, 내 결정 하나로 내 가족 전체를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연좌제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다. 저항 의지 자체를 인간의 뇌 속에서 설계 단계부터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변절이 있다. 보위부가 적발하는 반체제 활동의 실패 원인 과반수가 내부 변절과 자수다. 활동이
깊어질수록 연좌제의 공포가 영혼을 잠식하고, 결국 "나와
내 가족이라도 살아야겠다"며 자수하게 만드는 잔인한 구조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구조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결과다.
3. 저항의 기억을 지운다 — 존재의 삭제
북한의 통제는 진압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항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역사에서 지운다.
1995년 함경북도 청진에 주둔한 북한군 6군단
사건. 군 조직, 무기, 지역
기반까지 갖춘 북한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반체제 시도였다. 그래도 실패했다. 군 내부에도 보위국과 정치부가 중층으로 감시한다. 내부 밀고자가
먼저 움직였다. 수백 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북한은 "6군단"이라는 이름 자체를 군
편제에서 영구 삭제했다.
1998년 황해북도 송림시 황해제철소. 배급이
끊기자 간부들이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공장 자재를 팔아 식량을 구했다. 김정일은 이를 사회주의 질서
교란으로 규정했다. 105 전차사단의 탱크와 장갑차가 도시를 포위했고 간부 11명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됐다. 분노가 조직화 직전까지 갔으나 탱크
앞에서 침묵했다. 다른 독재국가였다면 반체제 운동으로 번졌을 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 북한 북부 지역의 한
교화소에서 대규모 집단 저항이 발생해 총격전으로 번졌다. 북한 당국은 전투기를 동원해 감옥 전체를 초토화했다. 공식 기록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의 후계 과정에서 반대편에 섰던 항일투사 최용건, 김동규는
우상화 도서는 물론 항일투쟁 기록에서 모두 삭제됐다. 숙청된 영화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북한에서 모두
사라졌다.
알려지지 않은 저항은 다음 저항의
씨앗이 되지 못한다. 기억이 없으면 계승도 없다.
4. 직접 경험 — 함흥에서 러시아까지
1984년 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에
나간 나는 6개월 만에 사상이 바뀌었다. 김정일의 정치가
틀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그래서 가장 친했던 대학 후배에게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띄웠다.
"우리, 좀 새로운 생각을 해보지
않겠느냐?"
그 순간 후배의 눈빛이 흔들리며 기겁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북한에서 저항의
씨앗은 이렇게 잉태되기도 전에 소멸한다. 비판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찾았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1988년 함흥 화학공업대학에서는 6명의
대학생이 비밀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이 깊어지자 1명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했다. 6명 전원이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
재판도, 발표도 없었다. 당국은 조용히 말을
흘렸다. "조직책이 남조선 간첩이었다더라." 이
사건을 함흥 시내에서 아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고 10명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중 한 명에게서 직접 들었다.
러시아 벌목장으로 가기 직전, 나를 가장 잘 아는 3명이 말했다.
"네가 도망칠까봐 걱정이다." 북한 안에서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던
말이었다. 벌목장 탈출 직전 찾아간 대학 선배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가능하면 살아남아서, 조선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라." 그 선배는 지금쯤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 안에도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외로운 개인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둘이
셋이 될 수 없고, 셋이 조직이 될 수 없었다.
결론 — 진달래꽃이 수십 번 피고 졌다
북한에서 1970년대부터 은밀히 도는 말이 있다.
"전쟁이 나면, 미국놈 죽이기 전에
먼저 죽여야 될 놈들이 따로 있다."
분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항상 있었고 지금도 끓어오르고 있다. 다만 표출할 방법과
구조를 빼앗겼을 뿐이다.
6·25 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이 후퇴하며 주민들에게 남긴 말이 있었다. "진달래꽃이 피면 돌아오겠다." 그 진달래가 수십
번 피고 졌다. 북한 주민들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외부의 누군가가 와주기를 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다.
남한에 온 고학력 탈북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내부 자생적 혁명은 불가능하다. 외부의 강력한 충격이
필수적이다.
북한 주민이 무기력하거나 세뇌됐기
때문이 아니다.
저항하려는 자가 느끼는 공포가, 독재 세력이 느끼는 공포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이유다.
김승철 | 1993년 탈북, 1994년
한국 입국. 전 북한연구소 연구원(1997-2007), 전
북한개혁방송 대표(2008-2025). 현재 유튜브 채널 "북한맨 NKMAN" 운영.
블로그: wiarae31.blogspot.com | 유튜브: 북한맨 N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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