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6년 말부터 불교 잡지 <금강>에 기고했던 연재물입니다. 북한 현실의 시대성과 진실성, 현실성을 위해 원고 교정을 거쳤습니다. 40년 전 제가 직접 겪었던 북한의 배급 풍경을 통해, 잊혀가는 북한의 민낯을 다시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북한을 떠난지 5년만에 쓴 글이고 다시 30년이 지나 다시 보니 그때에도 북한주민들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1회 : 배급날, 어머니의 근심으로 시작되는 하루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북한주민들에게 배급이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다. 배급을 정상적으로 정해진 양으로 받는다는 것은 가정의 안정과 화목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서민들이 농담삼아 진담으로 제기하는 화두가 바로 배급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
삶을 위해 노력하기 이전에 생존을 걱적해야 하는 북한주민들의 처절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배급은 북한주민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국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북한에서 배급은 주민 통제의 가장 강력한 수단중의 하나였다.
배급날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그처럼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기에 배급이라는 말만 들어도 북한의 어머니들은 가슴을 조인다. 배급은 한달에 두번, 그 배급을 타는 날이 오면 어머니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찬다. 배급날까지 가족의 식사를 보장하기 위해 남은 식량과 모자라는 식량을 걱정하며 속을 태운다. 밥 주걱을 몇번이고 이 밥그릇 저 밥그릇으로 옮겨보고 이번에는 또 어느 집에 가서 렴치불구하고 쌀을 꾸어올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배급을 타온 날이면 좁은 부엌바닥에 쌀을 쏟아놓고 날자수와 끼니수에 맞게 나누어 하루에 얼마만큼 먹어야 하는지도 가늠해보고 그렇게도 맞추어 놓았었건만 모자라는 것은 여전한 것이다.
잡곡으로 채워지는 밥그릇
국가에서 주는 배급이 점점 작아지고 잡곡의 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날수록 가장들의 밥그릇에도 쌀알이 보이기 힘들게 잡곡이 섞인다. 집안 식구중 누군가 장사라도 하는 경우가 아니거나 농촌에서 친척에게 쌀을 받는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가족들의 밥 그릇은 점점 내려가고 나중에는 죽으로 바뀌게 되는것이다. 그러다가 집에 손님이라도 오거나 제사를 치르고, 작업동원으로 도시락이라도 며칠동안 싸게 되면 식량이 추가로 지출돼 어머니의 치밀했던 계획은 그만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하는 수 없이 장마당에 나가서 비싼 값에 쌀을 사거나 저녁을 굶는 수밖에 없다. 북한 로동자의 한달 봉급으로 쌀 한두 되를 겨우 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도적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장에서 생산품이나 좋으면 은밀히 훔쳐다가 팔아먹을 수도 있으나 그런 행운은 모두에게 차례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굶으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밀려오는 서러움을 달래며 배급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새벽 4시, 배급소 앞 풍경
배급날이 다가오면 식량배급소 앞마당은 밀린 배급을 타려고 모여온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노인들로 마치 장터를 방불케 한다. 필자의 어머니도 새벽 4~5시경에 먼저 나가서 줄을 잡으시고 기다리시다가 동생을 깨워서 내려가 대신 줄을 서게 한뒤 자신은 집으로 들어와 아침을 준비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새벽 2시경에 나와서 줄을 서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 9시경이면 양정사업소(구역마다 정미소와 식량창고를 합한것을 말함)에서 화물트럭으로 또는 우마차로 식량을 실어온다. 배급소 문앞에 구름처럼 모여 줄을 맞추느라, 순서를 지키느라 다투고 급기야는 여자들끼리 머리끄뎅이를 잡고 싸우기도 한다. 오랜 세월 가슴에 쌓여온 불만과 응어리들이 온갖 상스러운 욕설로 터져나온다. 그래도 배급을 비교적 맞추어 줄 때에는 배급소에 남자들이 가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식량사정이 긴장해지면서 남자들도 나타나 연약한 여자들을 밀쳐내고 욕을 해댄다.
쌀 10%, 잡곡 90%
배급을 주는것도 제대로 주는 날이 별로 없다. 어떤 날은 외국에서는 사료용으로 쓴다는 통밀만 주거나 잡곡이 없다고 입쌀만 준다. 그러니 집에 식량이 떨어진 집들은 먼저 쌀밥만 먹거나 잡곡밥만 먹다가 나머지 배급날까지는 쌀이 떨어지면 잡곡밥만 먹어야 하는 것이다. 배급이라는 것이 살 30%에 잡곡 70%를 주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살 10%에 잡곡 90%를 주었다.
잡곡이라는 것은 쌀을 제외한 다른 낟알을 말하는데 옥수수와 밀, 밀가루 혹은 옥수수를 타갠것이나 옥수수 가루, 국수를 말한다. 가정주부들은 국수나 가루는 음식을 해놓으면 그 양이 배급량에 비해서 작기 때문에 식량이 모자라는 집은 아주 싫어한다. 밀도 겉깍지가 있는 통밀을 줄 때도 있고 으깨서 주는 때도 있는데 통밀은 제일 먹기 힘든 밥이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배불리 먹어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
그래도 그런 배급이나마 탈 때는 행복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의 식량난으로 북한은 배급제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남한 TV에서 북한 주민들이 배급을 타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서글프게 웃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배급을 타면 집에 와서 그것을 다시 됫박으로 다시 되여보시고 "이번 달에는 우리 식구가 한 끼에 요만큼 먹어야 한다."라고 하시던 어머니. 한 평생을 살아 오시면서 언제 한번 마음편할 날이 없으신 북한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 봄철이면 "지금쯤이면 산에는 산나물이 많이 날텐데 몸이나 성하면 산나물이라도 뜯어서 식량보탬이라도 하겠는데...." 하고 말 꼬리를 흐리시던 어머니였다.
[다음 편 예고] 다음 글에서는 배급만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밥상 이야기 — 김장과 채소, 간장과 된장을 둘러싼 궁핍,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몰랐던 간부들만의 특별공급소 "65호공급소"의 실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필자 추기 — 2026년]
한국에 입국한지 2년 반만에 쓴 글이라 당시의 추억 그 자체만 강조하는 글이었다. 표현력도 좋지 않아 당시 북한의 상황을 디테일하게 살리지 못했지만 2000년대 이후 북한의 상황을 계속 들어온 나에게 그때에도 이렇게 어려웠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많은 탈북자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배급을 주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내 청년기에 어머니가 부엌에서 살았던 그 비참했던 삶을 아직도 북한의 어머니들이 계속 대를 이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고통스럽고 음울한 삶은 언제면 끝나게 될까.
북한이라는 세상 최악의 독재가 왜 유지되는지... 북한 TV에서 보여지는 북한사람들이 왜 그토록 무표정하고 거칠고 까만 피부에 여윈몸으로 무기력하게 보였는지 새삼 느낀다. 북한주민들의 옷차림과 건강과 표정이 바뀌지 않는한 북한은 결코 세습독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 소개]
글쓴이: 김승철 (닉네임: NKMAN)
전) 북한개혁방송(North Korea Reform Radio) 대표 (2008~2025)
전) 북한연구소(Institute of North Korea Studies) 연구원 (1997~2007)
문의 및 제안: nkmans@naver.com
태그: 80년대 북한 이야기, 칼럼, 다시 읽는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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