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7년 1월, 불교잡지 「금강」에 게재되었던 칼럼을 원문 그대로 옮기며 정리한 것입니다. 필자가 1980년대 북한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로, 표현은 다듬되 원문 문장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프롤로그
북한에서 새해 첫 명절은 유난히도 특별하다. 힘들게 살고, 사람마다 성분과 지역과 직업과 직위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에 새해가 오면 북한사람들은 나름대로 미련으로 희망을 가진다. 종교도, 미신도 통제하지만 그래도 뭔가에 기대하고 희망을 거는 그런 계기가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이다.
조상제사를 지내고, 사회적, 사상적 흐름에 따라 수령 김일성에게 충성한다고 인사하려 가는 사람들이 그때는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도 들리는데 모르겠다... 이런 설날에 새롭게 다지는 '충성의 마음'은 국가와 당에 잘 보여서 힘들고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설날이 되면 새롭게 충성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북한당국의 아주 은밀하고 치밀하게 사상적으로 세뇌시키는 프로그램의 결과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오는 탈북자들에게 들어보면 사람들마다, 계층별로 설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랐다. 90년대 대량아사를 맞아 북한은 사람도, 문화도, 전통도, 관습도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지금의 북한은 또 크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가난만은 여전하다고 한다. 그 모습이 달라졌을뿐...
새해 첫아침에는 조상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언제부터 음력설에서 구정으로 옮겨졌는지는 모른다. 아마 북한 당국이 8. 15이후 음력설 대신 양력설을 쇠도록 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제사는 새해를 맞는 첫 시간(새벽 0시)에 지내기도 하고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에 상을 차려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12월 31일 저녁이면 집집마다 설 공급 부식물을 사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오면 제상을 차릴 음식준비로 바쁘다. 대부분 아침 새벽 일찍 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아침 일찍 제상을 차리다 보면 제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어른들의 한숨이 방안 가득 채우고 어린 아이들은 오랜만의 기름내 나는 음식을 먹기만을 기다리기에 지쳐 어머니에게 떼를 쓰기도 한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물고기를 제상에 놓을때 "동두서미"라며 규칙을 지키려고 하던 일이다. 그리고 어설픈 제상을 차려놓고 제상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없어도 정성을 다했으니 조상님들이 알아주시겠지..." 하며 쓸쓸하게 위안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북한에서는 TV에서 간혹 제사상을 차리는 방법을 방영하지만 극히 드문 일이고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상식적으로 알려주는 책자도 없다. 북한은 사회주의 생활문화 보급을 위해 ‘복고주의’의 타도를 위해 민간에 전해내려오는 풍습을 통제했다. 또 집안의 어른들이 오래전에 하던 풍습을 통제 때문에 후대에 공개적으로 전수해주지 않아 새로 살림을 꾸리거나 부모가 사망한 경우에는 살면서 엿보거나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상식으로 제상을 차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제상의 제물을 차려놓는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제상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은 제물을 구하기가 힘든 것도 한 몫 한다.
설날 아침, 김일성에게 인사를 드리다
| 평양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찾아 새해 인사를 하는 북한주민들 |
1월1일 설날 아침의 특이한 풍경은 김일성에게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다. 설날 아침이면 김일성의 동상이 있는 도시에서는 당과 행정 조직에서 아침에 김일성 동상에 꽃바구니를 드리는 행사를 진행한다. 이 행사는 아침 김일성의 신년사가 방송되기 전에 치르어지는데 여기에는 기관 기업소, 공장의 책임 간부들과 열성당원들을 위주로 치른다.
신년사 앞에서는 취할 수 없다
설명절의 금기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김일성의 신년사가 진행되기 전에는 술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 것이다. 이 금기사항은 법적으로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이 김부자 우상화 교육을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면서 ‘새해의 전투적 과업’을 제시하는 김일성의 신년사를 정중하고 맑은 몸가짐으로 임하도록 교육한 결과이다.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술을 마셔도 김일성의 신년사를 청취하고 마셔야 하며 아침 제술을 먹으면 남들의 눈에 띄우는 것을 꺼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젊은이들도 간혹 신년사 전에 친구들 집을 찾아 다니며 술마시며 TV를 보기도 하지만 그리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들도 신년사가 끝나고서야 본격적으로 술마시려 친구들 집을 찾아다닌다.
이와 같은 신년사 청취 분위기는 설전에 공장 기업소, 기관에서 당 및 기타 조직 책임자들이 설명절에 대비해 신년사를 어떻게 청취할 것인가에 대해 주의 사항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날 아침이라도 밖을 내다보면 거리에는 차거운 바람만이 몰아칠뿐 설날이라는 분위기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집집마다 풍기는 음식냄새만이 오늘이 설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거의가 집에서 신년사를 들어야 하는 이유중 또 하나는 설이 지난후 첫 출근을 하면 신년사 학습 정도를 검열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다년간 얼마나 주민사상교육을 열심히 그리고 강도높게 진행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년사가 끝나야 시작되는 명절
신년사가 끝나면 바깥에는 사람들의 물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까운 친척이나 처가 혹은 시댁에 인사를 드리려 가는데 오전 11시가 되여야 가능하다. 12시쯤 되면 거리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이때에야 설명절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구역마다 몇 개밖에 없는 공업품 상점들에는 설을 계기로 특별히 일부 품목을 자유판매한다. 상점에는 물건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식료상점에는 전날 사지 못한 사람들이 설 공급물량이 떨어지기 전에 사려고 붐빈다.
김일성동상이 있는 곳에는 대체로 공원이 꾸려져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구경을 나와서 붐빈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이 그룹을 이루어 여기저기서 놀고 어린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많다. 김일성 동상 아래 인사를 하도록 특별히 마련된 공터에는 한복을 입은 여성들과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 줄을 지어 대렬을 맞춘 학생들, 가족들이 김일성 동상에 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힘들게나마 먹고 사는것이 김일성 때문인 것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정직하고 순박한, 우상화교육으로 김일성을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새해 ‘열심히 일하여 충성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의’를 김일성동상에 드리는 것을 새해 첫 일정으로 잡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생각에는 아침에 TV에 비쳐진 김일성의 신년사 모습이 “인민을 위한 수령님의 모습”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새벽의 기억
김일성 동상을 찾은 사람들로 더욱 붐비는 시간은 새해 첫 새벽이다. 북한도 새해의 첫 시간대에는 평양의 대동강가의 련광정의 종을 타종한다. 그 시각이면 ‘가장 위대한 김일성’찾아 새해 첫 인사를 드리려는 사람들로 김일성 동상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다. 0시를 맞춰 공장, 기관의 노동자나 직원, 학교와 대학의 학생들이 단체로 오거나 개별적으로 또는 끼리끼리 동상을 찾아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처음에는 당과 사로청을 비롯한 조직들에서 주민들을 동원하였지만 우상화교육이 심화되면서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새해 첫 인사를 김일성에게 드리려고 찾는다. 필자도 고등중학교 시절에 김부자의 동상을 찾아 동심에 사로잡혀 김일성의 어버이 다움을 숭상하며 충성을 맹세하곤 했었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는 다년간, 그리고 아주 치밀하게 조직되어 왔다. 때문에 김일성 사후 북한주민들은 그렇게도 ‘광적으로’ 눈물바다, 울음바다를 북한 전역에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은 취기, 긴 한숨
오후 시간에 접어들면서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항상 잡곡밥에 찬거리라야 김치가 전부인 그들의 위장은 한없이 연약하다. 어쩌다 명절을 만나 좋은 음식에 술까지 한잔 곁들이니 지나온 한해를 나름대로 회고하고 새해의 행운을 바라며 한잔두잔 마시다 보니 금방 취하는 것이다. 술기운에 순간만이라도 편안해보려고 빈속에 술을 하기 때문에 더욱 취하게 되고 취한김에 또 모자라는 술을 얻어먹으려 친구들 집으로, 친척집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저녁쯤이면 아파트 밑에 있는 창고사이에 쓰러진 몸을 눕히거나 주변의 묘지같은 무연탄 더미에 쓰러진 고달픈 삶의 모습들이 보이기도 한다. 집들에서는 언제 즐거운 명절이 있었던듯 노란 옥수수 잡곡밥에 김치하나를 달랑 찬거리로 둥그런 밥상에 모여 앉아 ‘즐거웠던’ 설명절을 떠나 보낸다.
이틀 만에 끝나는 명절
설명절은 2일을 쉬지만 설 첫날이 지나가면 명절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이틀째의 설명절은 간부들에게나 설날이지 일반주민들에게는 보통날이나 다름없다. 3일날 아침에는 아침 일찍이 직장으로 출근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의 선서’ 모임을 진행한다. 그러고 나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또 한해의 삶이 시작되고 배고픈 매일이 그들 앞에 기약도 없이 다가온다.
필자 추기 — 2026년
남한에 와서 처음에는 북한에 형님이 있다고 설을 맞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죄스러움, 미안함이 있어 제사를 지내다가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설명절이 되면 항상 아버지가 조상제사를 지내던 생각이 난다. 남한에 와서 대구에 큰어머니를 찾아갔을때 무당집에 가면 누군가 조상제사를 또 지내는 것 같다고 했다는데 바로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1980년 12월 설명절을 하루 앞두고 돌아가셨으니 나에게 설명절은 특별하다. 그 이후로 수령에게 인사하려 가는 것을 하지 않았다. 부질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사상이 본격적으로 변했던 것같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북한의 설명절은 여전하다고 하는데... 달라진게 있다면 80년대는 국가의 공급과 개인의 노력에 따라 설명절을 쇠는 수준이 정해졌는데 지금은 완전히 개인의 능력에 따른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게 살가. 그런 삶을 당연하다고, 온 세상이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는 북한사람들은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고향 사람들에게 세상바깥을 보여주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여전한 것 같아 우울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 소개
글쓴이: 김승철 (닉네임: NKMAN)
현) 북한 정체 및 민주화 전략가
전) 북한개혁방송(North Korea Reform Radio) 대표 (2008~2025)
전) 북한연구소(Institute of North Korea Studies) 연구원 (1997~2007)
문의 및 제안: nkma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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