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5월.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김포공항은 기자들로 꽉 찼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을 탈출한 우리 다섯 명은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에서 공개적으로 받아들인 역사상 첫 탈북자들이었다. 입국 직후 안기부 조사가 시작됐다. 그 조사 과정에,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남한 사회는 들끓었다. "북한, 이마나 가겠나?"
제 끝난 거 아니냐." "길어야 1~2년이다." "5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조사관들이 나에게도 물었다.
"북한, 저 상태로 얼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적어도 30년은 더 갈 것입니다."
조사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조사받던 탈북자들도 나를 이상하게 봤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이 지났다. 북한은 여전히 존재한다. 김일성의 손자가 핵무기를 들고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30년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이 틀렸다.
왜 북한 붕괴론은 30년 동안 반복됐고, 왜 계속 틀렸는가.
다섯 번의 "이번엔 진짜다", 다섯 번의 오판
북한 붕괴론의 역사는 예측 실패의 역사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계 체제가 불안정하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아니다. 길어야 몇 년이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 정도면 주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2011년, 김정일 사망. "20대 후계자는 경험이 없다. 군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2013년, 장성택 처형. "최측근까지 처형했다. 내부에서 반발이 터질 것이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2020년, 코로나 봉쇄. "완전 고립에 경제가 마비됐다. 이번엔 다르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매번 "이번엔 진짜다"라는 말이 나왔다. 매번 틀렸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단순히 예측만 틀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틀린 논리가 매번 반복됐다. "주민이 고통받으면 저항이 나온다." "지도자가 바뀌면 체제가 흔들린다." "측근을 숙청하면 내부에서 반발이 생긴다." 이 논리들은 왜 계속 틀렸는가.
오판의 구조 — 북한에 민주주의 논리를 대입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인 오판이다.
붕괴론자들은 북한을 분석할 때 자신들이 사는 세계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온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고통받으면 정권이 바뀐다. 선거가 있고, 언론이 있고, 시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 주민이 굶주리면 저항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경제가 무너지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북한에서 고통이 저항의 동력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비교 대상이다. "다른 세상은 우리처럼 살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분노가 체제를 향한다. 그러나 북한 주민 대부분은 다른 세계를 모른다. 배고픔은 그저 배고픔일 뿐, 체제에 대한 분노로 전환되지 않는다.
둘째는 함께 저항할 누군가다. 혼자 분노하는 것과 함께 저항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북한에서는 옆집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가 보위부 정보원일 수 있다. 사회생활의 첫 번째 원칙이 '말조심'이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먼저 입을 열겠는가.
"투쟁하고 싶다. 시위하고 싶다. 그런데 누구와 하지? 나의 친구? 그가 보위부 정보원이라면? 괜히 말했다가 나만 사라지는 것 아닌가?"
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분노가 차고 넘쳐도 참을 수밖에 없다. 300만 명이 굶어 죽던 90년대에도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오히려 김정일을 걱정했다. "장군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이것이 세뇌된 공포의 힘이다.
두 번째 오판은 지도자 교체에 관한 것이다. "지도자가 죽으면 체제가 흔들린다"는 논리는 지도자 개인이 체제를 지탱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북한은 지도자 한 명의 나라가 아니다. 당, 군, 보위부, 행정기관의 수십만 간부 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체제를 떠받치고 있다. 저항은 죽음이지만, 독재자를 지켜주는 대가로 권력과 부패의 과실을 누린다.
김정일이 죽었을 때 후계자는 20대였다. 그런데도 체제가 흔들리지 않은 것은 김정은 개인이 강해서가 아니다. 체제를 유지해야 자신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수십만 간부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오판은 숙청에 관한 것이다. "측근을 숙청하면 내부 반발이 생긴다"는 말은 맞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다. 숙청은 반발을 만들지 않는다. 숙청은 공포를 만든다. 장성택이 처형됐을 때 그의 동료들은 반발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치를 떨며 더 충성했다. "나는 장성택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숙청의 진짜 기능은 반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반발할 생각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붕괴론이 반복되는 진짜 이유 — 바라는 마음이 분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왜 이 틀린 논리가 30년 동안 반복됐는가.
나는 이것이 분석의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라는 마음이 분석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한다. 탈북민,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 북한 인권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은 자연스러운 염원이다. 나도 그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무너져야 한다"는 당위와 "북한이 무너질 것이다"는 예측은 전혀 다른 명제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순간, 분석은 희망이 된다. 희망은 반복된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붕괴론이 반복될수록 정말 필요한 질문이 사라진다.
"북한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그 구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 대신, 매번 "이번엔 무너질 것이다"라는 말만 반복된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으면 다음 사건을 기다린다. 이것은 전략이 아니다. 이것은 대기다.
나는 북한에 있던 20대 중반부터 북한 지도자와 체제를 비판했다. 저항과 탄압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30년 전에 "북한은 더 간다"고 했을 때, 비관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구조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구조를 알아야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균열은 가능하다 — 그러나 붕괴를 기다리는 것과는 다르다
3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북한은 핵을 가졌다. 3대 세습을 완성했고, 10대 딸 주애가 김정은의 권위를 조금씩 넘겨받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나 30년 전과 달라진 것도 있다. 장마당 세대가 자랐다. 외부 정보가 들어가고 있다. 스마트폰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북한 주민의 의식이 30년 전과 같지 않다.
나는 여전히 북한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균열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붕괴를 기다리는 것과 균열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 북한 독재는 어떤 구조로 유지되는가. 그 구조 안에 어떤 약점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시리즈는 그 질문에 답하려 한다.
북한 30년, 남한 30년의 경험으로 냉정하게 북한을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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